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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수도에 얽힌 추억, 수돗물 목욕합니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C030202
지역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상원

물이 고픈 춘의동

“수돗물 목욕합니다“라고 써 붙인 목욕탕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1986년까지도 이 시의 상수도 사정은 여간 나쁜 것이 아니었다. 인천시에서 쓰는 물을 하루에 이만 톤씩 얻어 쓰다가 물이 너무 모자라자 안산시에서도 하루에 삼만 오천 톤을 얻어다 썼는데 그러다보니 하루걸러 수돗물이 나오고 높은 곳에서는 밤에만 쫄쫄거리다 말아 주민들이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1982년에는 여월동에 오만 톤짜리 정수장 시설을 갖추기도 했지만 한 해에 줄잡아 15퍼센트씩 인구가 늘어나는 바람에 수돗물 사정이 전혀 나아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변두리에 새로 짓는 집에서는 아예 펌프 시설을 갖추고 지하수를 퍼 올려 생활했다. 그러다가 1986년에 서울시의 허락을 받아 한강에 취수장을 만들고 그 강물을 걸러다 먹게 된 뒤로 한결 물 걱정을 덜게 되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공중수도가 들어오자 춘의동 주민들은 개울물, 우물물 대신 동네 곳곳에 마련된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쓰게 됐다. 덕분에 물을 긷는 데 드는 수고는 물론 콜레라와 같은 수인성 질병이 많이 줄었다. 당시 세균이 득실거렸던 물을 정수장이 깨끗이 위생 처리해 공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천에서는 제일 먼저 심곡동 자유시장에 수도가 들어왔다. 그리고 춘의동에는 당시 중앙로가 개통될 때 수도선이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장비가 엉망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수도설치를 도왔다고 한다. 이 공사의 책임자였던 한기원 씨는 군청에서 최초로 수도과 업무를 담당하면서 공중수도를 설치한 최초의 인물이다.

“처음에 부천에서 인천으로다가 수도선이 갔어요. 그래 삼정동에서 수도선을 따가지고서 여기 심곡 2동 뒤에까지 본선을 끌어 온 거예요. 그래서 그 이듬해에 자유시장 안에만 우선 댔어요. 그냥 그때 장비가 엉망이지, 그래도 까짓것! 그냥 빵꾸 난데다 마른 나무로 쐐기를 치는 거야. 그것은 경험이에요. ‘마른 나무가 물을 먹어서 불어서 꽉 잠긴다’ 이거야. 그래 물난리가 나서 발로다 밟고 말이야. 내가 왜 이걸 하게 됐냐면 처음 내가 읍에 가서 총무를 보고 있을 적에는 ‘수도과’라는 것이 없었어요. 근데 그냥 총무를 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읍장이 ‘한주사가 (읍사무소에) 가서 (수도 놓는 일) 좀 봐!’ 그래서 밤에 그냥 시장 골목을 파고서 공중수도를 놔 준 거예요.”(한기원, 당아래 주민, 1932년생)

공중수도가 설치되고 1960년대에 들어서자 경제개발에 따른 인구증가는 하루가 다르게 부천을 팽창시켰고 급수 수요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중수도의 보급률은 매우 낮은 편이었고 수도 상태도 좋지 않았다. 지금은 언제 틀어도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이지만 당시에는 수압이 낮거나 배수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찔끔거리는 수돗물과 씨름하는 게 일과였다.

부천에 최초로 수도를 끌어들인 한기원 씨는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당아래) 마을에는 맨 마지막에 들어 왔을 거라고 회상했다.

“이 동네는 맨 나중에 들어 왔을 거예요. 동네가 한 팔십 사오년 정도에 들어왔을 것 같은데. 여긴 그린벨트 지역이고 집들도 옛날 그대로 있고 해서 맨 나중에 들어왔어. 사람 숫자도 적고 수지가 안 나니까 못하고 있었던 거야.”(한기원, 당아래 주민, 1932년생)

겉저리에 사시는 이정웅 할아버지(이정웅, 겉저리 주민, 1939년생)도 손가락으로 한참을 세어 보더니 삼십년은 훌쩍 넘긴 일이라고 하신다.

“여기 (수도가) 들어온 건, 내가 지금 70인데, 거진 30대 후반에 들어왔어요. 한 서른 대여섯 일곱 그렇게 해서 들어왔어요. 부천시에는 그 전에 들어갔고, 70년대에 여기 길이 났고. 여기 중앙로 날 때는 수도가 안 들어 왔어요. 그 후에 들어왔어요.”(이정웅, 당아래 주민, 1939년생)

마을에 공동수도가 설치되기 전까지 지하수를 먹었다는 춘의동. 춘의사거리에서 당아래 방향으로 계남큰길이 생기면서 길을 새로 내면서 외지 산업체들이 들어오는 등 도시화되자, 물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할 수 없이 겉저리 동네는 새로 우물을 파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마을이 도시 계획이 되면서 요 동네의 길을 새로 냈거든요. 그게 춘의로인데 사람들이 도로공사 때문에 살던 집하고 마시는 우물까지 다 헐렸어요. 그리고 공장들이 지저분한 집들을 다 헐고 들어왔거든요. 그래가지고 원래 살던 사람들이 땅이 여기 다 있으니까 새로 집하고 우물을 지었는데 요 앞이 논이고 해서 우물이 그다지 깊지 않았어요. 그리고 공장은 자꾸 들어오는데 수도가 없으니까 동네 지하수가 마르는 거야. 그래서 수도를 대기 시작한 거죠. 그 때 수도라면 자기네 대는 데까지는 자가 부담 아녜요? 수도를 놓으려면 몇 집이서 돈을 공동부담해서 먹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낫소 공장 밑에 흐르는 얕은 물을 이용했어요. 물지게로 새벽마다 물을 나르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돈을 얻어서라도 수도를 냈어요.”(이정웅, 당아래 주민, 1939년생)

한편 도시가 팽창하면서 도로와 주택건설이 빈번해지자 덩달아 토지 보상에 관한 화제도 물망에 올랐다. 당시 부천군청 도시과에서 신작로 건설에 필요한 토지 보상에 관한 일을 맡았다는 한기원 씨는 해당 가구당 20~30만 원 정도의 적지 않은 보상이 책정됐지만 보상금액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오는 통에 마음고생도 많이 하셨다고 당시를 회상하였다.

“내가 보상 한번 볼 적에 심곡 2동 2지구, 1지구 2지구 지구별로 봤다고요. 어느 날 비가 구질구질 오는데 누가 들어오면서 아, 어떤 사람이 지금 보상금 때문에 오고 있다고 빨리 피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아! 그래서 그냥 도망가서 숨었지 뭐야. 그런데 밖이 조용해! 그래 어떻게 된 거야? 그랬더니 아녜요. 아녜요. 그냥 장난으로 그랬어요. 그러더라고. 그런 적이 많았다고.”(한기원, 당아래 주민, 1932년생)

사철 푸릇푸릇한 그린벨트 지역이 물이 고픈 마을이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충격이기도 하지만, 수도만 틀면 콸콸 흐르는 물을 귀한 줄 모르고 쓰는 지금의 삶을 반추하게도 한다.

[정보제공]

  • •  이정웅(당아래 주민, 1939년생)
  • •  한기원(당아래 주민, 1932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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