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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7004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공식명칭 The Korean War
이칭/별칭 한국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 6.25전쟁 발발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 - 6.25전쟁 휴전 조인
성격 사건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까지 경기도 부천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

[개설]

6.25전쟁 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약 3년 1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부천 지역도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수도 서울과 인접했기에 서울 방어와 탈환을 위한 공방전이 전개된 지역임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전황에 대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북위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이북에는 소련군이 주둔하였다. 1947년부터 격화된 미·소 냉전의 영향으로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1948년 5월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다. 북한에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양측은 통일을 외치며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계속하였다. 광복 이후 3년간의 정치 공백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강요된 외압에 따라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끝내는 6.25전쟁이라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경과]

전쟁 발발 초기 부천 지역에서 전개된 상황은 다음과 같다. 1950년 6월 28일 날이 밝자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또한 이날 새벽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오후 12시를 전후하여 북한군의 선견대가 김포읍에 진출하였다. 일몰 무렵 비행장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시흥과 한강 인도교까지는 14㎞ 이내의 거리였다. 이날 저녁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소사읍사무소에 지휘소를 개설하고 주민들의 협력을 얻어 수용 병력에 대한 급식을 서두르는 한편, 각 부대별로 밤을 새워 대오를 수습하였다. 그러고는 후보생대대와 기갑연대 도보대대 및 부평경찰대[경감 김억순]를 계양산 동쪽 능선에 배치하여 김포-부평도로를 차단하도록 하고, 제22연대와 제12연대 병력으로 비행장 남쪽 구릉지대의 107고지 일대에 배치하여 적의 소사로 남진을 저지하도록 조치하였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7월 3일까지 소사-영등포 부근에서 적과 수차례에 걸쳐 일대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소사 지역에 집결 중인 제18연대장 임충식 중령에게 부대를 통합 지휘하도록 조치하였다. 저녁에 임충식 중령은 비행장 일대에는 이미 북한군이 방어 배치를 마쳤고, 곧 소사로 공격하기 위해 경인가도의 분단을 기도할 것이라고 보고 지휘소를 소래로 옮겼고, 원미산[138고지]을 중심으로 하는 고지군을 확보하여 적의 남진을 막게 하였다. 소사의 제22연대 제3대대 일부를 원미산 북쪽의 제18연대 제2대대 진지에 투입하였다. 30일 아침 혼성 병력이 원미산 북쪽에서 북한군 제6사단과 대결하게 되었다. 고지선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경인가도의 위협을 제거하는 전황의 호전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현재 부천 지역에서 6.25전쟁과 관련된 내용으로는 춘의사거리 부근 마을인 겉저리에 영국군이 주둔하면서 겉저리 뒷산을 깎아 내 운동장을 만들어 야구와 각종 운동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결과]

6.25전쟁 중 많이 일어난 북한군에 의한 납치 피해는 서울을 중심으로 북쪽[개성, 파주 등], 서쪽[시흥, 인천, 강화 등], 남쪽[용인, 평택 등], 동쪽[양평, 가평 등]의 상황이 서로 조금씩 달랐다. 이른바 반동분자는 시, 군의 내무서에 연행된 후 서울로 이송한 경우가 많았으나, 강제 의용군의 경우는 지역에 따라 이동 경로나 지역별 할당량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당시 부천 지역은 납북자가 958명[5.4%]이고, 시흥은 644명, 김포는 1,315명이었다. 대체로 경기 서부 및 도서 지방[인천, 강화, 김포, 부천, 연백, 옹진, 수원 일부 지역 등]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6.25전쟁 초기 북한의 남침 경로가 서부전선 지역으로 전개되었고, 납치사건 대부분이 전쟁 초기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부천 지역 역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으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큰 고통을 당하였다. 인적·물적 피해도 컸지만, 북한의 점령과 수복을 두 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좌익과 우익의 충돌과 이로 인한 주민들 간의 대결 의식·증오가 내면화되어 큰 후유증을 남겼다. 결국 개인적·집단적 고통이 지속되면서 분단 의식이 고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남북 화해와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민족 통일을 이루어야 치유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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