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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2013
한자 百中-大同祝祭-農旗叩頭-
영어의미역 Nonggigodumari, Festival of Buddhist All soul's Day
이칭/별칭 상좌다툼놀이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상동|중동
집필자 변남섭

[개설]

농기고두마리는 1800년대 초부터 1910년대까지 옛 부평군 석천면, 현재의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상동중동 일대에서 이어온 민속놀이다. 지명을 따서 석천농기고두마리라고도 한다. 논농사의 세벌매기를 마치고 7월 백중날에 행한 풍물이 어우러진 놀이로서 특히 조선 철종 때 성행했던 것으로 전한다.

이 지역 촌로들에 따르면, 초창기의 농기고두마리는 인근 마을 중에서 농기를 먼저 만들어 사용한 마을이 상좌에 오르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대 중반 이후 여러 마을에서 농기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을 대항 농기 쟁탈전으로 변화, 발전하였고, 이런 까닭에 ‘상좌다툼’이라 부르기도 한다.

농기고두마리는 모두가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고된 농사철을 일단락 지어 보내며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뜻으로 행해져 온 흥겨운 놀이이며, 다른 한편으로 반상의 차이가 엄격한 사회에서 신분 상승에 대한 바람을 농기다툼의 승자를 통해 나타냈다고도 한다.

[싸움과 놀이의 하나 됨, 농기싸움]

석천마을과 솔안마을 간의 농기다툼이 놀이의 절정을 이룬다. 두 마을이 모여 넓은 터에서 농기싸움을 했고, 싸움의 승패에 따라 싸움에서 패한 마을은 자기 마을의 농기로 이긴 마을의 농기에 기 세배를 올려 예를 표함으로써 형님 마을과 동생 마을이 정해졌고, 두 마을이 1년간 형제의 의를 나누기도 했다.

각 마을은 이 농기싸움을 위해 공동체간의 단합과 지혜를 모았고 힘든 농사일을 놀이로 승화시켰던 아름다운 민속놀이이다. 이 때문에 ‘고두마리’의 어원은 신라시대 이두문 ‘고두수(머리를 조아린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농기싸움에서 패자 측 농기가 승자 측 농기에게 머리를 조아린다는 데서 나온 의미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는 농기의 제일 위에 있는 기봉을 지칭한다. 농기(農旗)는 청·홍·황·백의 네 가지 색깔을 사용하여 만들며, 맡은 임무에 따라 명령을 내리는 영(令)기, 마을을 대표하는 대표기, 용이 그려진 용담기, 사방을 다스리는 사방기(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로 이루어진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조직, 두레]

두레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하려는 우리 민중들의 지혜로운 생존 방식으로 농경 세시풍속의 가장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생산 노동 조직을 일컫는다. 이 두레는 농촌 사회의 상호 협력과 감찰을 목적으로 하며, 공동으로 이앙·관개·제초·수확 등의 작업을 하였다. 농사(農社)·농계(農契)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규모에 따라 마을 전체가 의무적으로 참가하는 동두레(대두레), 농사일만을 위해 부분적으로 조직하는 두레, 꼴을 베는 풀베기두레나 초벌두레·이벌두레·만벌두레 등과 같은 김매기를 위한 농사두레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여자들만으로 조직되는 길쌈두레도 있었다.

이러한 두레는 두레마다 기가 있고 인접한 촌락의 두레와 두레 사이에는 조직의 선후와 세력의 우열을 따져 선생두레·제자두레 혹은 형두레·아우두레라고 하고 기로써 예를 표하였다. 그리고 유흥으로 농악(풍장, 메구, 금고 등 지역과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어 졌다)을 연주하였는데, 일꾼들의 피로를 덜게 하는 동시에 서로 일손을 맞추어 주는 구실을 하였다. 또한 작업이 있기 전에 미리 마을을 돌며 전곡을 거둬들여 출역에 따라 분배하고 일부는 적립하였다가 교량 가설, 농기구 구입 등에 쓴다. 두레패가 치는 농악을 두레풍장이라고도 한다.

두레는 모내기가 끝난 초여름에 조직을 정비한다. 호미모둠이라는 회의를 거쳐 두레를 이끌어 나갈 일꾼 즉 지도자들을 뽑고 농사일의 순번 등을 정하였다. 지도자를 중심으로 무더운 여름날 뙤약볕에서 집중적으로 일시에 많은 논을 맨다. 이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때문에 두레기를 만들어 그 아래 모이고 악기를 치고 신명을 잡으며 논두렁으로 가는 두레는 그 모습에서 더위와 무거운 고통을 이겨내려는 강한 의지와 일과 놀이를 합해 노동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를 느끼게 한다.

일이 끝나면 다시 두레기를 앞세우고 풍장을 울리면서 돌아오는데, 인근 두레기를 만나면 선생두레·형님두레 등을 따져서 좌우로 흔들면서 인사를 하여 예를 갖추거나 술을 대접하였다. 때로는 기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벌메기인 만벌두레가 7월 백중 경에 끝이 나면 호미씻이라고 하는 행사가 따랐다. 호미를 씻어 걸어둠으로써 한해의 농사를 맺고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낸 후 여러 가지 놀이 등이 펼쳐졌다.

부천 지역에서도 농사일을 위하여 조직된 두레가 호미를 씻어 허리에 걸어 두고 두레 기 싸움인 농기고두마리라는 놀이로써 농사일의 고달픔을 씻고 신나게 즐겼던 것이다. 남쪽은 물론이고 북쪽까지 퍼지던 두레는 해방 전후 시기까지 이어지다 제초제가 들어오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따라서 두레가 끝나면 이루어졌던 놀이도 자연스레 사라져가게 되었다.

[김매기 끝낸 뒤의 호미씻이날, 백중]

한해 여름의 가장 힘겨운 노동인 김매기를 끝냄으로써 사실상 그 해의 농사를 맺은 농민들은 고통을 달래면서 하루를 즐기게 된다. 이날이 7월 백중인데 두레를 맺는 날로 두레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매일 놀면 노는 것에 많은 재미가 없겠지만 더위를 이겨내고 기나긴 한해의 농사일을 마무리한 뒤의 놀이는 성대한 축제 이상이었을 것이다. 조선 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가 우리나라의 연중행사와 풍속을 설명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백중을 중원(中元)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7월) 15일을 우리나라 풍속에서 백종일(百種日)이라 한다. 승려들은 재를 올려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고 큰 명절로 친다. -중략- 또 우란분경에는 석가모니의 제자인 목련비구가 오미를 가진 음식과 온갖 과일을 갖추어 분에 담아서 시방대덕에게 공양했다고 했다. 지금 말하는 백중날은 백과(百果)를 말하는 것 같다.

-중략- 우리나라 풍속에 백중날을 망혼일(亡魂日)이라고 한다. 대개 민가에서는 이날 밤 달이 뜨면 채소·과일·술·밥 등을 차려놓고 망친(亡親)의 혼을 불러 재를 올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중략- 충청도 풍속에 15일에는 노소를 막론하고 거리에 나가 배불리 먹고 마시며 흥겹게 놀고, 또 씨름놀이도 한다.”

불가에서는 죄를 지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하여 목련존자가 공양을 올리는 날인데, 이는 결국 어머니를 구하는 것과 더불어 살아 있는 사람들이 나누어 먹음으로써 같이 고통을 벗어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민가에서는 망친께 먼저 예를 올림으로써 조상과 더불어 하늘에다 농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불리 먹고 씨름놀이 등을 통하여 그간의 고달픔을 풀어내는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백중날은 조상께 고마워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흥겹게 노는 모두가 일을 한 단락 맺고 그간의 고통을 풀어내는 즐거운 날이다. 두레에서는 이날이 바로 그해의 모든 김매기를 마치고 호미를 씻어 걸어두는 호미씻이 날인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백중날에 무엇을 하나]

부천 외의 다른 지역은 백중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살펴보자.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는 밀양백중놀이는 경상남도 밀양 지역에 전승되는 놀이로서 바쁜 농사일을 끝내고 고된 일을 해오던 머슴들이 음력 7월 15일경 용날을 선택하여 지주들로부터 하루 휴가를 얻어 흥겹게 노는 놀이를 말한다. 밀양에서는 머슴날이라고 하며 지주들이 준비해 주는 술과 음식을 일컫는 꼼배기참을 먹으며 논다 해서 꼼배기참놀이라고도 부른다.

밀양 백중놀이는 농신제, 머슴들 가운데 농사에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 지게목발로 만든 작두말에 태워 놀이판을 돌면서 농악으로 흥을 돋우어 시위하는 작두말타기, 춤판, 뒤풀이 등으로 짜여 진행된다. 상민과 천민들의 한이 전체 놀이에서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는 논산의 연산백중놀이도 밀양에서처럼 머슴날이라고도 한다. 연산백중놀이는 제를 지내고, 효자 효부에 대한 상과 불효자에 대한 벌을 논하고, 그 해 농사를 잘 지은 머슴을 뽑아 상을 준 후 농악으로 흥을 돋우고 양반춤과 광대들의 해학적인 춤이 한바탕 어우러진다. 형태는 다르지만 일을 맺고 즐기는 의미는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양시의 송포호미걸이는 호미씻이라고도 하는데, 한해 농사일을 끝낸 후 다음 해의 농사를 위해 호미를 씻어 걸어둔다는 뜻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송포호미걸이는 농촌에서 활발했던 두레 공동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세벌 김매기가 끝나는 음력 7월로 접어들면 호미걸이가 행해지는데, 농기의 버릿줄에 주렁주렁 호미를 걸어둠으로써 사실상 한해 농사를 마감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호미걸이는 매년 하는 것이 아니고 두벌김을 멜 때쯤 그 해 농사를 어느 정도 가늠하여 농사가 잘 되었다고 판단될 때만 했다고 한다.

호미걸이가 결정되면 마을 사람들은 놀이에 쓰일 악기와 깃발을 점검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 잔치 준비를 한다. 당일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남자들이 모여 기를 앞세우고 길군악(행진 풍물)을 치며 당 앞에 가서 상산제를 지냈다. 다음에는 여자들이 당 마당에 시루상을 차려 놓고 대동제를 지냈는데, 상산제는 한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대동제에는 질병 없고 사람이 다치지 말라는 기원이 담겨 있다.

풍물대동제가 끝나면 기를 앞세우고 이웃마을 두레패들을 맞이하러 마을 어귀로 향하면 이웃 두레패들은 술독을 담은 수레를 끌고 당 마당에 모여든다. 이에 기(旗) 절받기, 기 쓸기 등을 하면서 한데 어우러져 한바탕 신명나게 풍물을 치며 놀다가 해질녘이 되면 이웃 두레패들은 돌아간다. 이웃 두레패들이 돌아가고 나면 집돌이를 하며 호미걸이를 마무리한다.

두레의 힘과 풍류를 담고 있는 송포호미걸이는 1931년을 끝으로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으나 최근 보존회의 노력으로 부분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부천과 가까운 고양 지역의 송포호미걸이는 기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호미를 씻고 제를 올리며 이웃 두레패와 같이 하는 면에서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부천과 마찬가지로 모습이 사라진 전통을 복원하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대동축제로 거듭난 농기고두마리]

백중날에 어떤 의식을 갖고 어떻게 놀이를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재현된 놀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전반부는 논매기와 호미씻이, 호미걸이 및 풍농을 기원하는 제사를 모시는 과정이고, 후반부는 농기를 뺏기 위해 전의를 불태우며 하는 싸움놀이와 기뻐하는 승자와 안타까워하는 패자간의 예와 우애 그리고 서로 하나 되는 신나는 뒤풀이로 이루어져 있다.

1. 일하러 가기

논길을 따라 양쪽 마을 풍물패가 두레기·용기·농기 등 여러 기를 앞세우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논두렁으로 향한다.

2. 논매기 준비를 위한 한마당 놀이

농기는 양쪽으로 갈라서고 풍물패(두레 풍장패)는 동서로 갈라져 자기 마을의 농군과 한바탕 신명나게 춤을 추며 논다. 풍물이 그치면 북이 논매기 준비를 알리기 위해 점고를 한다. 점고가 끝나면 농군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논 안으로 들어간다.

3. 논매기

선소리꾼의 소리에 따라 농군들이 일제히 뒷소리를 받으며 상사뒤 소리에 맞춰 논매기를 한다. 논매기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면 농군들이 원모양을 만들면 방애소리로 넘어간다. 논매기가 다 끝나면 모두가 ‘와’하는 함성을 지르면서 양손을 번쩍 든다.

○ 「논매는 소리」[「상사뒤 소리」]

(선소리) 에렐렐 상사뒤여/ 옳지 그렇지 잘도나 헌다/ 먼데 사람은 듣기나 좋게/ 가깐데 분은 보기가 좋게/ 일심은 써서 잘도나 매고/ 하나 둘이서 허실지라도/ 열 스물이 허는 것처럼/ 일심을 써서 잘도나 허세 ∥(뒷소리) 에렐렐 상사뒤여

○ 「논매는 소리」[「방애 소리」]

(선소리) 에 헤헤리 방애호/ 방아 방아 방아야/ 이 방아가 뉘 방안가/ 방아방아가 돌방아냐/ 다 되어 간다 ∥(뒷소리) 에 헤리 방애호

4. 논매고 난 후 풍물놀이

‘와’ 하는 함성이 끝나면 논둑에서 북잽이가 점고를 한다. 풍물잽이는 신명나게 풍물을 치고 농군들은 손발을 씻고 호미를 허리에 차고는 논 밖으로 춤을 덩실덩실 추며 나온다.

5. 풍년제 지내기: 풍물이 진행되는 동안 지난해 패자 마을 사람들이 제사상을 차려 놓는다. 상좌 측 상쇠가 풍물가락을 맺고 전체 마을 사람들에게 “근동 사람들아 이내 말을 들어보소. 우리 모두 함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세.” 하면 모두가 “좋지.” 하고 받는다. 농기는 그 자리에 세워두고 양쪽 마을 사람 제사상 앞으로 오고 풍물패들 양옆으로 모여 선다.

상쇠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앉으면 우집사격인 사람이 잔에 술을 부어 상쇠에게 건넨다. 상쇠는 술잔을 받아 제사상에 놓고 삼배하고 엎드려 있으면 축문이 낭독된다. 축문 낭독이 끝나면 음복하고 일어나 다시 우집사가 술을 부어 주고 상쇠가 받아 상위에 놓고 삼배한 후 소지한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제사상을 패자 마을 사람들이 갖고 나감으로써 풍년제가 끝나고 양쪽 마을에서 일제히 풍물을 친다.

○ 축문

유세차/ 갑술 계유삭 8월 3일 유학 ○○○(승자마을 상쇠) 감소 고우 수물재신/ 해산지동 유령소지 호청리한 어좌어우 구재억려 가분왕매 유도사응/ 유치사격 소화납경 이안차화 궤자유생 숙비신원 자용 준 공선 건고/ 상향

6. 농기싸움

풍물패는 농기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서 풍물을 치고 농군들은 자기 마을의 사기를 돋우는 함성과 춤으로 열기를 달군 후 풍물을 맺는다. 그러면 지난해 승자 마을에서 패자 마을에 고두마리 싸움을 하자고 점고를 보고 패자 마을에서도 싸움에 응한다는 답례의 점고를 보낸다. 놀이에 앞서 지난 해 패자 마을의 농기가 상좌마을의 농기에 기 세배로 예를 갖춘다. 기 세배가 끝나면 양쪽 마을 풍물패와 농군들은 농기를 중심으로 응원전을 펼친다.

각 마을의 농기와 풍물패와 농군들은 빙빙 돌면서 만났다가 멀어지기도 하면서 서로 한껏 기세를 펴며 자웅을 겨룬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싸움이 시작되는데, 마을 사람들의 절반은 자기 마을의 농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빙 둘러서고 나머지 절반은 상대 마을의 농기를 쓰러뜨리기 위해 상대 마을 농기를 향해 달려간다. 먼저 농기에 꽂혀 있는 깃털 봉(고두마리)를 뽑은 쪽이 이 싸움의 승자가 된다.

7. 농기싸움 후의 모습

승자가 결정되는 순간 이긴 쪽에서는 ‘와’ 하는 환호성을 지르고, 패자 쪽 농군들은 땅에 풀썩 주저앉아 짚신을 벗어 던지고 땅을 치며 분해한다. 이때 승자마을에서는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며 논다.

8. 농기싸움 후 예 올림

풍물을 치며 신명나게 놀 때 패자 측에서 음식상을 차려나와 승자 측을 향해 놓으면 상쇠가 가락을 맺고 음식상 앞에 먼저 앉는다. 부쇠가 술을 따르고 잔을 올리면 상쇠가 받아 마신다. 이때 승자마을 농군들은 ‘와’ 하고 함성을 지르고 패자 측 농군들은 땅을 치며 분해한다.

술을 마신 상좌 측 상쇠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술상은 패자 부쇠가 물린다. 상좌 측 상쇠가 패자 측 ‘고두마리’를 패자 마을 상쇠에게 전달해 주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말을 전하고, 패자마을 상쇠는 고두마리를 자기 마을 농기에 꽂는다. 이어 기 세배를 하는데, 농기를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흔들고 세워서 절을 하면 상좌 측 농기는 기를 약간 숙여서 인사를 받는다.

9. 하나 됨의 뒤풀이

기 세배가 끝나면 상좌 측 상쇠가 “인근 마을 농부들아/ 이내 말을 들어 보소/ 올해도 농사는 대풍이오/ 우리 함께 어울려/ 신명나게 놀아 보세” 하면 양쪽 마을 농군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른 뒤 양쪽 마을 풍물패가 하나 되어 신명나게 풍물을 치고 양쪽 농군들도 하나가 되어 춤을 추며 논다. 신명난 놀이가 끝나면 각 마을로 돌아간다.

[전통의 되살림]

부천의 농기싸움놀이인 석천농기고두마리는 1910년대까지 전승되다가 안타깝게도 그 맥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부천문화원(사)민족문화연구소 복사골마당[상쇠 손영철]이 협동하여 토박이 원로들의 고증을 통해 어렵게 재현해 낸 것이 1994년이다. 그 재현된 농기고두마리로 1997년에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우수상을 수상하고, 1999년에는 경기도 대표로 전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여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50여 명의 인원과 농사와 마을 축제에 필요한 많은 소품이 준비되어야만 재현할 수 있는, 규모가 큰 석천농기고두마리는 그야말로 긴장감 있고 흥에 겨운 마을 축제이다. 현재는 추석을 전후하여 일 년에 1회 재현하고 있지만, 꾸준하게 준비할 수 있는 보존회 형식의 준비 모임이 존재하지 않아 그 계승과 보존이 불확실한 형편이다. 제초제와 트랙터가 김매기 등의 많은 농사일을 대신함으로써 두레는 사라지고 그 놀이도 볼 수가 없다. 이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보존을 걱정하며 고민할 필요는 무엇인가? 시대는 변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부천의 농기고두마리도 마찬가지 처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분단, 근대화를 앞세운 전통 파괴 등으로 우리의 속을 채우고 있던 진정한 알맹이는 차츰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남아 있는 것도 참된 의미를 잃고 있다. 이에 현실과 겉모습이 맞지 않는다고 버릴 것이 아니라 이런 전통을 하나하나 살려냄으로써 힘든 삶을 헤쳐 나가며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면서 터득한 조상들의 지혜가 오늘의 삶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 되살아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