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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045
한자 人文地理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희태김정은

[정의]

경기도 부천시의 도시화 및 산업화, 교통 및 관광, 행정 구역, 인구 등의 인문 지리적 요건.

[개설]

부천시는 대도시인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자리하고 있고, 동서남북으로 교통이 편리해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20여 년간 지속된 중동·상동 신시가지의 개발 및 주택 공급으로 전입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며 수도권의 주요 도시로 성장하였다.

[행정 구역 변천]

부천은 ‘주부토(主夫吐)’, ‘장제(長提)’, ‘수주(樹州)’, ‘안남(安南)’, ‘계양(桂陽)’, ‘길주(吉州)’, ‘부평(富平)’에 이어서 쓰이는 행정 구역의 명칭이다. 부천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 이전의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리울 봉배산 중턱에서 대단위 주택지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한강 지류 지역인 부천의 선사시대 역사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부천은 비류 백제에 포함되었다가 비류 백제가 온조 백제에 편입되면서 온조 백제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470년(장수왕 58) 김포 반도에 설치된 주부토군에 속하였다. 주부토군은 ‘물가에 접해 있는 둑이 늘어선 고을’이라는 뜻이다. 부평의 지명은 고구려 시기 지명인 주부토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부(富)는 ‘지아비 부(夫)’ 자를 표현한 것이며, ‘평(平)’은 평야를 가리킨다. 따라서 ‘부평’은 ‘넓은 평야’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서 부평현(富平縣)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부평군의 전 지역과 인천부 일부, 남양군 일부, 강화도의 도서 일부를 통합하여 15개 면에 이르는 부천군이 탄생하였다. 이름은 부평의 부(富) 자와 인천의 천(川) 자에서 따왔다. 1936년 문학면 일부와 다주면 일부가 인천부로 편입되었고, 1940년 4월 1일에는 문학면·남동면·부내면·서곶면이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9면이 옹진군·시흥군·김포군에 이관되고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었다. 1975년 김포군의 오정면이 부천시에 편입되었다. 1993년 중동 신시가지 개발에 따른 인구 증가로 중구를 원미구(遠美區)오정구(梧丁區)로 나누고, 역곡동·중동·상동을 제외한 남구는 소사구(素砂區)로 명칭을 바꾸었다. 1995년 인천광역시 부평구 서운동 일부가 오정구 삼정동[현 삼정동]에 편입되었고, 원미구 중1동이 중1동중3동으로 나누어졌다.

원미구·소사구·오정구 3개의 행정구를 운영하던 부천시는 행정자치부로부터 2015년 ‘자치구가 아닌 구 폐지 승인’을 받아 그동안 시·구·동으로 이어지는 3단계 행정 체계를 폐지하고 시·동 2단계로 간소화하고 그 대신 행정복지센터를 개설하였다. 일반 구를 두고 있던 시가 자발적으로 구를 폐지한 것은 부천시가 전국 최초이다. 행정복지센터란 2~5개의 동주민센터를 하나의 권역으로 묶고 그 중심이 되는 동[행정복지센터]에 인력과 기능을 확대하여 구청 업무와 복지, 일자리 상담, 건강 관리, 청소 등 주민 생활과 밀접한 현정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2019년 7월 1일 행정 체제 개편을 통해 36개의 동주민센터가 10개의 광역동과 28개의 주민지원센터로 구성 및 운영되며 ‘광역동’ 행정 체제가 시행되었다.

[도시화와 산업 환경]

부천시는 지리적으로 서울의 서쪽에 있어, 인천과 인접한 경인공업지대의 중심으로 교통과 산업의 교두보 역할을 해 왔다. 부천시의 도시화와 산업 환경은 크게 5단계 발전 과정을 겪었다. 1단계는 1899년 경인선 개통과 더불어 취락지가 형성되면서 서울과 인천을 잇는 교통 요충지로 성장을 하게 된 1945년까지의 기간이다. 2단계는 광복 이후부터 1973년 시 승격 이전까지의 기간으로 1960년대 ‘경인공업지구’로 지정되고, 1968년 경인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도시화와 산업화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제3단계는 1973년 부천시로 승격하면서 주거 기능과 공업 기능을 담당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소사역부천역으로 개칭되고, 1979년 시 청사가 이전하면서 시가지 확장이 이루어지고 토지구획정리 등 산업화와 더불어 도시 발전이 가속화하였다. 제4단계는 1980년 이후 서울 인구의 과밀화와 과대화에 따라 근접 도시인 부천시의 비중과 성장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5단계는 2000년도인 21세기를 맞이하여 부천시의 공업화에 따른 도시 구조 변화와 시가지의 확장, 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늘어나면서 인천과 서울을 잇는 산업 중간 지대로의 역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2022년 현재 부천시는 공업 지역으로 지정된 지 30년 이상이 되어 기반 시설이 노후화됨에 따라 노후된 산업단지를 재생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 중이며, 신규 산업단지 개발 계획을 바탕으로 도시첨단산업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부천시는 자체 내의 도시화와 산업화의 기틀을 바탕으로 서울·인천과 유기적인 관계로 나아갈 것이다.

아울러 대도시로서의 면모를 위해 보다 완결된 도시 공간 구조를 형성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바라보게 되었다. 따라서 부천시는 수도권 외곽의 인적 자원을 활용하는 지식 집약적인 활동으로 위치적 이점을 이용하여 문화 예술 등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특히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음악 등 30여 년간 추진한 문화 사업을 토대로 문화의 산업화를 위한 시책을 추진 중이다. 그 결과 부천시는 2019년 12월 제1차 법정문화도시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교통·관광]

부천시는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통로 지역으로 산업과 함께 일찍부터 교통이 발달하였다. 경인선 철도와 경인고속국도가 남부로 이어져 있고, 경인고속국도와 여러 노선의 국도가 북부에서 동서로 연결되는 등 교통축이 동서 방향으로 발달되어 편리한 교통망을 형성하고 있다.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까지 10분, 서해안 고속국도까지 20분, 인천국제공항까지 30분, 인천항까지 40분이 소요되며 또한 주요 간선 도로가 남북 방향으로 이어져 있어 주변 어느 지역과도 연결이 용이한 교통의 요충 지역이다.

경인선 철도와 경인고속국도는 2대 간선 교통로로 서울과 인천항을 연결하여 산업 발달에 동력이 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지역 내 통행, 서울·인천을 연계하는 지역 간 통행 수요가 높아 특정 시간대에 교통 혼잡이 초래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2012년 10월 지하철 7호선 부천 구간이 개통하여 운행 중이다.

또한, 남북 교류 확대를 위해 국토교통부에서 추진 중인 서해선 복선 전철[화양-원시]과 연계되는 간선 기능 철도망에 부천시가 포함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원활하지 못했던 남북 간 교통 소통도 보다 원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부천시의 경우 2018년 6월 소사-원시 복선 전철이 이미 개통되었으며 2021년에 소사-원종 구간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관광 측면에서는 대규모 경공업 제조 업체와 화학 공장들이 단지를 이루고 있어 산업 관광지로도 알려져 있으며, 남부의 성주산·거마산·할미산 등은 도시민들에게 위락과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신흥동의 제조 업체와 원미산, 성주산의 관광 농원, 도당산 밑의 장미꽃 축제 그리고 여우고개와 신앙촌으로 이어지는 관광 코스가 도시를 종단하고 있으며, 곳곳에 자연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근린공원·시민 운동장·실내 체육관·수영장 및 골프 연습장 등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애니메이션·영화 등의 문화 예술 거리가 조성되어 있어 신흥 관광 단지로 부상하고 있다.

한편 부천의 향토문화재로는 변종인 묘와 신도비, 한언 묘와 묘표, 한준 묘와 신도비, 이한규 묘, 부천석천농기고두마리, 귀인 조씨 묘, 화유옹주 묘 등이 있다. 아울러 문화유적으로는 청동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의 취락과 제천의식 유적, 다양한 유물을 쏟아낸 바 있는 고강동 선사유적 주거지, 여월동 선사유적 주거지가 있고, 민속의례로 중동 장말도굿, 윗소사 대동산신제, 먼마루 도당우물대동제 등의 역사 문화 관광자원이 있다.

[인구 변화]

한 지역의 공간 구조 변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지표 중 하나가 인구 변화이다. 부천은 시로 승격하면서 인구 집중과 도시화가 촉진되었다. 1973년 부천시로 승격될 당시 인구는 6만 5080명이었다. 그러다 1980년 22만 1475명으로 급증하였고, 1985년에는 50만 619명으로 50만 명을 넘어섰다.

인구 증가는 곧 시의 발전과 연결된다. 따라서 이에 수반하여 도시 구조, 교통망 구축, 산업 시설, 공공시설, 중심 지역, 주거 지역 등 전반적인 구조 변화를 맞게 된다.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과 이에 따른 부천시의 도시화와 산업구조의 발전이 조화를 이루면서 1990년 66만 7993명으로 17년 만에 10배 이상 인구 증가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부천시의 인구는 2002년 82만 1081명, 2004년 86만 4501명을 거쳐 2008년 86만 7678명 이후 인구 증가율이 조금씩 상승해 2010년에는 87만 5204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2011년부터 인구 성장률이 하락한 이후 2017년에는 인구 성장률 -0.0%으로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였으며, 2018년에는 -0.4%, 2019년에는 1.4%로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화하는 추세이다.

2022년 기준 부천시의 인구는 34만 6643가구, 79만 7855명[남 39만 5197명, 여 40만 2658명]으로, 가구당 2.30명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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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인문지리 1) <소표제>[행정구역 변천]</소표제>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은 ‘<지명 검색='1' 검색어='주부토'>주부토(主夫吐)</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장제(長提)</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수주'>수주(樹州)</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안남'>안남(安南)</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계양'>계양(桂陽)</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길주(吉州)</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부평(富平)</지명>’에 이어 쓰인 행정 명칭이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 이전의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명 검색='1' 검색어='고리울'>고리울</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봉배산'>봉배산</지명> 중턱에서 대단위 주택지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지명 검색='0' 검색어=''>한강</지명> 지류 지역인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의 선사시대 역사를 유추해 볼 수 있다.</문단>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은 <지명 검색='0' 검색어=''>비류백제</지명>에 포함되었고, <지명 검색='0' 검색어=''>비류백제</지명>가 <지명 검색='0' 검색어=''>온조백제</지명>로 편입되면서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도 <지명 검색='0' 검색어=''>온조백제</지명>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470년(장수왕 58) <지명 검색='0' 검색어=''>김포반도</지명>에 <지명 검색='1' 검색어='주부토군'>주부토군</지명>이 설치되면서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은 이에 속하게 되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주부토군'>주부토군</지명>을 해석하면 ‘물가에 접해 있는 둑이 늘어선 고을’이라는 뜻이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부평</지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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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어=''>고강본동</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고강1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오정동'>오정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신흥동'>신흥동</지명> 등 7개가 있다.</문단> -->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은 ‘<지명 검색='1' 검색어='주부토'>주부토(主夫吐)</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장제(長提)</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수주'>수주(樹州)</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안남'>안남(安南)</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계양'>계양(桂陽)</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길주(吉州)</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부평(富平)</지명>’에 이어 쓰인 행정 명칭이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 이전의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명 검색='1' 검색어='고리울'>고리울</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봉배산'>봉배산</지명> 중턱에서 대단위 주택지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지명 검색='0' 검색어=''>한강</지명> 지류 지역인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의 선사시대 역사를 유추해 볼 수 있다.</문단>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은 <지명 검색='0' 검색어=''>비류백제</지명>에 포함되었고, <지명 검색='0' 검색어=''>비류백제</지명>가 <지명 검색='0' 검색어=''>온조백제</지명>로 편입되면서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도 <지명 검색='0' 검색어=''>온조백제</지명>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470년(장수왕 58) <지명 검색='0' 검색어=''>김포반도</지명>에 <지명 검색='1' 검색어='주부토군'>주부토군</지명>이 설치되면서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은 이에 속하게 되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주부토군'>주부토군</지명>을 해석하면 ‘물가에 접해 있는 둑이 늘어선 고을’이라는 뜻이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부평</지명>의 지명은 고구려 시기 지명인 <지명 검색='1' 검색어='주부토'>주부토</지명>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부(富)는 부(夫)를 표현한 것이며, 평(平)은 평야를 가리키는 토(吐)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므로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부평</지명>이란 ‘넓은 평야’를 아우르는 땅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도호부'>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지명>에서 <지명 검색='0' 검색어=''>부평현(富平縣)</지명>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문단> <문단>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군'>부평군</지명>의 전 지역과 <지명 검색='1' 검색어='인천부'>인천부</지명> 일부, <지명 검색='0' 검색어=''>남양군</지명> 일부, <지명 검색='0' 검색어=''>강화도</지명>의 도서 일부를 통합하여 15개 면에 이르는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군'>부천군</지명>이 탄생했다. 이는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부평</지명>의 부(富)와 <지명 검색='0' 검색어=''>인천</지명>의 천(川)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1936년 <지명 검색='0' 검색어=''>문학면</지명> 일부와 <지명 검색='0' 검색어=''>다주면</지명> 일부가 <지명 검색='1' 검색어='인천부'>인천부</지명>로 편입되었고, 1940년 4월 1일에는 <지명 검색='0' 검색어=''>문학면</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남동면</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부내면</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서곶면</지명>이 <지명 검색='1' 검색어='인천부'>인천부</지명>에 편입되었다.</문단> <문단>1973년 7월 1일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군'>부천군</지명>이 폐지되면서 9면이 <지명 검색='0' 검색어=''>옹진군</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시흥군</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김포군</지명>에 이관되고 <지명 검색='0' 검색어=''>소사읍</지명>이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시'>부천시</지명>로 승격되었으며, 1975년 <지명 검색='0' 검색어=''>김포군</지명>의 <지명 검색='0' 검색어=''>오정면</지명>이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시'>부천시</지명>에 편입되었다. 1993년 <지명 검색='1' 검색어='중동'>중동</지명> 신시가지 개발에 따른 인구 증가로 <지명 검색='0' 검색어=''>중구</지명>를 <지명 검색='1' 검색어='원미구'>원미구(遠美區)</지명>와 <지명 검색='1' 검색어='오정구'>오정구(梧丁區)</지명>로 나누고, <지명 검색='1' 검색어='역곡동'>역곡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중동'>중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상동'>상동</지명>을 제외한 <지명 검색='0' 검색어=''>남구</지명>는 <지명 검색='1' 검색어='소사구'>소사구(素砂區)</지명>로 명칭이 바뀌었다. 1995년 <지명 검색='0' 검색어=''>인천광역시 부평구 서운동</지명> 일부가 <지명 검색='1' 검색어='삼정동'>오정구 삼정동</지명>에 편입되었고, <지명 검색='1' 검색어='중동'>원미구 중1동</지명>이 <지명 검색='1' 검색어='중동'>중1동</지명>과 <지명 검색='1' 검색어='중동'>중3동</지명>으로 나뉘어졌다. 2003년 <지명 검색='1' 검색어='원미구'>원미구</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소사구'>소사구</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오정구'>오정구</지명> 등 3개 <지명 검색='0' 검색어=''>구로</지명>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문단> <문단>2010년 현재 행정동은 총 37개로, <지명 검색='1' 검색어='원미구'>원미구</지명>에 <지명 검색='1' 검색어='심곡동'>심곡1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심곡동'>심곡2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심곡동'>심곡3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원미동'>원미1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원미동'>원미2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소사동'>소사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역곡동'>역곡1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역곡동'>역곡2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춘의동'>춘의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도당동'>도당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약대동'>약대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중동'>중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상동'>상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중동'>중1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중동'>중2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중동'>중3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중동'>중4동</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상1동</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상2동</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상3동</지명> 등 20개, <지명 검색='1' 검색어='소사구'>소사구</지명>에 <지명 검색='1' 검색어='심곡본1동'>심곡본1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심곡본동'>심곡본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소사본동'>소사본1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소사본2동'>소사본2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소사본동'>소사본3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범박동'>범박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괴안동'>괴안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역곡동'>역곡3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송내동'>송내1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송내동'>송내2동</지명> 등 10개, <지명 검색='1' 검색어='오정구'>오정구</지명>에 <지명 검색='1' 검색어='성곡동'>성곡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원종동'>원종1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원종동'>원종2동</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고강본동</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고강1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오정동'>오정동</지명>·<지명 검색='1' 검색어='신흥동'>신흥동</지명> 등 7개가 있다.</문단> 2) <소표제>[인구 변화]</소표제> <문단>한 지역의 공간 구조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핵심적인 지표 중 하나가 인구 변화이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이 시로 승격되면서 인구 집중과 도시화가 촉진되었다. 1973년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시'>부천시</지명>로 승격될 당시 인구는 6만 5,080명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 22만 1,475명으로 급증하였고 1985년에는 50만 619명으로 50만 명을 넘어섰다.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과 이에 따른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시'>부천시</지명>의 도시화와 산업 구조의 발전이 조화를 이루면서 1990년 66만 7,993명으로 17년 만에 10배 이상의 인구 증가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문단> <문단>인구 증가는 곧 시의 발전과 연결된다. 따라서 이에 수반되어 도시 구조, 교통망 구축, 산업 시설, 공공 시설, 중심 지역, 주거 지역 등 전반적인 구조 변화를 맞게 된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시'>부천시</지명>의 인구는 2005년 86만 3,397명에 이어 2008년에는 <지명 검색='1' 검색어='원미구'>원미구</지명> 44만 3,290명, <지명 검색='1' 검색어='오정구'>오정구</지명> 19만 3,263명, <지명 검색='1' 검색어='소사구'>소사구</지명> 22만 7,484명 등 총 86만 4,037명이며, 이는 <지명 검색='0' 검색어=''>경기도</지명> 총인구의 7.9%에 달한다. 인구밀도는 1973년 2,427명이던 것이 1990년에는 1만 2,804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2008년 현재는 1만 6,150명으로 <지명 검색='0' 검색어=''>서울</지명>의 1만 7,110명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문단> --> <문단>한 지역의 공간 구조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핵심적인 지표 중 하나가 인구 변화이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이 시로 승격되면서 인구 집중과 도시화가 촉진되었다. 1973년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시'>부천시</지명>로 승격될 당시 인구는 6만 5,080명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 22만 1,475명으로 급증하였고 1985년에는 50만 619명으로 50만 명을 넘어섰다.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과 이에 따른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시'>부천시</지명>의 도시화와 산업 구조의 발전이 조화를 이루면서 1990년 66만 7,993명으로 17년 만에 10배 이상의 인구 증가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문단> <문단>인구 증가는 곧 시의 발전과 연결된다. 따라서 이에 수반되어 도시 구조, 교통망 구축, 산업 시설, 공공 시설, 중심 지역, 주거 지역 등 전반적인 구조 변화를 맞게 된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시'>부천시</지명>의 인구는 2005년 86만 3,397명에 이어 2008년에는 <지명 검색='1' 검색어='원미구'>원미구</지명> 44만 3,290명, <지명 검색='1' 검색어='오정구'>오정구</지명> 19만 3,263명, <지명 검색='1' 검색어='소사구'>소사구</지명> 22만 7,484명 등 총 86만 4,037명이며, 이는 <지명 검색='0' 검색어=''>경기도</지명> 총인구의 7.9%에 달한다. 인구밀도는 1973년 2,427명이던 것이 1990년에는 1만 2,804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2010년 현재는 869,944명으로 <지명 검색='0' 검색어=''>경기도</지명>인구의 7.9%를 차지하며, 인구밀도는 16,279km²로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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